당신의 데미안은 어디 있나요? 아직 만나지 못하셨나요? 아니 꼭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지요?
특정 종교의 선을 긋는 유일논리를 벗어나, 그동안 그리고 앞으로도, 다양한 작가들의 삶 속에 깃들여진 '인생'을 엿보았고, 물론 그들의 삶을 따라가 보게 될 것 같다. 몇 세기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이 갖는 사고의 방식은 그닥 다르지 않으리라 본다. 왜? 기본적으로 우리는 인간이라는 같은 종(種)이지 않은가? 단지, 수레바퀴 속의 등장인물만 바뀌고 있지 않은가? 몇 세기가 지나도 또 다른 인간은 지금의 우리와 같은 고민 속에서 살고 있지 않을까? 이렇게 보면, 니체의 '영원회귀'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는, 그의 차라투스트라를 언제쯤이나 만나게 될 지, 내심 기약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게 지나가는 긴 시간 속에서, 아주 짧은 여정이지만, '삶'이라는 것을 살아봤던 그리고 남아있는 약간의 시간을 조금은 생각하며 가야하지 않을까?
대부분 청소년 시절 권장도서로 읽었음직한 책이었다. 제목만이 머릿속에 남아있던 차에, 몇 십년만에 이 책을 손에서 다시 펼친 것이다. 주인공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만나면서, 꿈틀거리는 존재의 의미를 파헤쳐 가려는 몸부림,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도록 다가온 데미안이 기억 속에 남았더랬다. 금번, 다시 책장의 마지막을 덮으며, 싱클레어가 데미안이 되어가는 과정을 조금 더 선명히 보게 된다. 작가 헤르만 헤세의 치열한 몸부림을 상상해 보게 된다.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와의 작별을 이해한다. 에바 부인에게 느꼈음직했던 싱클레어의 마음이 좀 더 가깝게 전해지기도 한다.
"I wanted only to try to live in accord with the promptings which came from my true self. Why was that so very difficult?"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책의 첫 장에 남겨놓은 작가 헤르만헤세의 질문! 내가 나에게 물어야 하는 질문! 내가 '나의 존재'를 관찰하는 시간을 잊으며 살다보니, '나의 존재'를 잃어버린 나를 보라고 한다. 비단, 이 질문은 '데미안'이라는 한 작품이기 때문에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의 다른 작품들, 또는 다른 시대, 다른 철학가, 작가, 또는 화가 등에 의해서도 같은 질문은 현재도 그리고 앞으로도 이어지지 않을까? 이쯤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 윗 부분의 질문을 다시금 던져 보는 건 어떨까?
소설 '데미안'에서 빼 놓지 않고 기억나는 문구라 하면, 무엇보다 아래의 문장을 꼽을 것이다.
"The bird fights its way out of the egg. The egg is the world. Who would be born must first destroy a world. The bird flies to God. That God's name is Abraxas."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아이러니하게도, 일단 조금이라도 알을 깨기 시작한다면, 그 알을 깨야만 살 수 있다는 건 참으로 묘한 일이지 않는가? 또한, 알아둬야 할 것은, '아브락사스'라는 신을 숭배하자는 것이 아니다. 선(善)일수도 악(惡)일수도 있는 것, 신이기도 사탄이기도 하는 그 존재, 즉, 구분짓고 나누지 않는 열려있음 혹은 그 자체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지금, 혼자만의 자신의 공간에서, 자신에게 들어갈 때, 자신이 경험하는 그 세계는 어떤가? 선별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가? 욕심, 질투나 두려움에 떠는가? 옳고 그름을 구분지으려 하고, 조바심 때문에 마음이 혼미한가? 해저 깊은 곳의 심연을 그려보자. 겉 껍질의 나보다 각자 "우리 자신"을 보자는 것이다. 데미안의 명상(Meditation)을 기억하고 있는 독자라면 아마도 내가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지를 금방 알고 있으리라.
이미 우리는 바깥에서 정해놓은 세상의 온갖 틀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행복'은 이런 것이라고 정의된 세뇌를 받는다. '역사'는 인간의 욕구에 맞게 각색되어지고 있다. '정치가'들의 변화무쌍한 속내는 이미 역겹기 그지 없다. 사람들의 눈물을 짜내고 감성에 호소하여, 정해진 결론을 미화하는 방송들도 그렇다.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스며들었던 세상의 기준대로 만들어져 살고있는 우리 자신을 관찰해 보자고 작가는 전한다. 수돗물조차도 믿을 수 없어, 생수를 사먹어 온 지 오래다. 그것도 못 믿더워 필터를 통해 마시기도 한다. 우리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 보여지는 이미지, 자극하는 SNS 메세지 등을 접할 때, 과연 우리의 필터는 어디 있는가? 파랑색의 소식이 '당신'이라는 필터를 쳐서 빨강색이 되길 원한다. 남들이 하얀색이라할 때, 당신에게는 노랑색이라면, 그것이 당신 세상의 색깔이지 않겠는가?
소설 '데미안'을 통해서, 자고 있던 우리를 깨워보는 건 어떨까?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며 뚫고 나오고자하는 존재 본연의 뿌리가 우리의 표피를 찢고 나오기를 기다리자. 마침내, 태어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갈 때, '한 순간이라도 원하던 대로 살아봤소' 할 수 있는 자신의 세상을 즐기길 바란다.
지난 2024년에 '데미안'을 읽고 남겼던 감상은 아래의 링크에 남겨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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